위로받은 자로 사명의 길에 서다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사40:1)
국어사전에서 ‘위로’는 ‘마음을 어루만져 슬픔이나 괴로움을 덜어준다.’는 의미다.
위로는 조금씩 덜어낸다는 뜻이다.
사회학에서는 공동체(사회)를 연대하고 고립되고 닫혀있는 것을 열어주는 것을 위로라고 정의한다.
안전한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위로라고 심리학에서는 말한다.
그러나 성도인 우리는 신학적인 위로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신학적인 ‘위로’는 ‘하나님의 임재와 구속함의 동행’이다.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성도의 위로는 하나님이 나와 함께 동행할 때 참된 위로를 받는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고 세례를 받으실 때와 변화산에서 부활의 모습을 보여주셨을 때 하늘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기뻐하는 자’(마3:17)라는 음성이 들렸다.
인간의 몸을 입으신 예수님도 하나님 아버지의 적극적인 지원과 후원의 위로를 통해 이 세상을 새로운 세상으로 만드셨다.
본문에서 ‘위로하라’는 명령형이다.
누군가를 위로하라고 하나님께서는 명령하셨다.
그런데 누군가를 위로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위로하심을 경험해야 한다.
걸어보지 않는 길에 대한 말은 허공의 메아리와 같다.
먼저 경험할 위로는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과의 동행’이다.
위로의 주체는 전적으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요3:21)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한 자만이 위로자로 설 수 있다.
신앙은 흉내내는 것이 아니라 살아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위로를 경험한 만큼 위로자로 설 수 있다.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시게 하시는 이시로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우리가 환난 당하는 것도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 위로를 받는 것도 너희가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된 것 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고후1:4-7)
사역을 하는 중에 지치고 힘들어 하늘을 볼 때 눈물을 닦아 주시며 위로하시는 주님의 손길은 새로운 힘을 제공하신다.
아합왕 때 엘리야는 850명의 이방 제사장과 싸워 승리한다.
그러나 그 후 탈진되어 지쳐 있을 때 위로의 하나님께서 찾아오신다.
그분은 엘리야에게 선지자로서 주저앉아 있다고 책망하거나 또 다른 사역을 명하시지 않으신다.
다만 먹을 것을 주시며 쉬게 하셨다.
진정한 위로는 하나님이 주실 때 최고의 회복으로 나아갈 수 있다.
‘너희는 예루살렘의 마음에 닿도록 말하며 그것에게 외치라 그 노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느니라 그의 모든 죄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손에서 벌을 배나 받았느니라 할지니라 하시니라’(사40:2)
죄사함의 기쁨, 구원받은 기쁨으로 살아가는 모습이 위로받은 자의 모습이다.
그래서 위로는 ‘다시 숨을 쉬게 한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사40:3)
하나님의 위로는 사명을 위해 살게 하신다.
그래서 하나님의 위로를 받은 사람은 멈추지 않고 다시 시작하는 걸음을 떼게 한다.
2026년, 새해의 시작을 하나님의 위로하심에서 시작하여 위로받은 자로서 위로하는 자의 사명의 길을 걸을 수 있어야 한다.